신형철의 『물건의 서랍』: 기억의 저장고를 열다
오래된 서랍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물건 하나가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일으킨 경험이 있다. 신형철의 『물건의 서랍』은 바로 그런 경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책이다. 평론가로 더 잘 알려진 저자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사물이 말하는 우리의 삶
신형철은 책의 서두에서 "우리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의해 소유된다"고 말한다. 이 역설적인 문장은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만년필, 대학 시절 들었던 카세트 테이프, 첫 월급으로 산 책 등 평범한 물건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깊은 의미를 새겼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기억의 물질성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저자가 어머니의 오래된 화장품 케이스를 발견하는 대목이다. 그 케이스 안에는 어머니의 화장품이 아닌, 가족의 소소한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 가족 여행 때 주운 조개껍데기, 저자의 첫 돌 때 깎았던 머리카락, 유치원 소풍날 찍은 사진 한 장. 신형철은 이를 통해 물건이 단순한 사물이 아닌 '기억의 물질성'을 가진 존재임을 일깨운다.
현대 사회의 미니멀리즘 트렌드에 대한 저자의 성찰도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무작정 물건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각 물건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정서적 가치를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버릴 것을 선택하기 전에, 왜 그것을 간직했는지 기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구절은 오늘날 우리에게 특히 의미 있게 다가온다.
상실과 보존의 변증법
책의 후반부에서 신형철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경험한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물건들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닌, 부재하는 사람의 흔적이자 현존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물건이 갖는 '대리적 현존'의 의미를 탐구한다.
『물건의 서랍』은 문학평론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섬세한 언어로 일상의 사물에 깃든 의미를 포착해낸다. 서랍을 정리하는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자아와 기억, 시간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독자를 이끄는 지적 여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내 방의 물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 발견한 오래된 펜처럼 말이다. 단순히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이 아닌, 내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기억의 저장고'로서 말이다.
신형철은 말한다. "우리는 물건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만나고,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며, 미래의 자신을 상상한다." 오늘 저녁, 나는 조금 더 오래된 물건들을 들여다 볼 예정이다. 그리고 그곳에 담긴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여다볼 계획이다.